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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코스]탄금대공원 |
스트리트 생성일 : 2007. 08.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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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공원 소개

들리느냐 우륵의 가야금소리가, 보이느냐 신립장군의 투혼 열정이... - 탄금대공원

 

탄금대는 대문산에 위치하여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곳에 있다. 이곳은 신라 진흥왕 때 가야국에서 망명한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탄주한 곳이라고 하여 탄금대라 부르며 임진왜란 때 도순변사 신립장군이 8,000여 명의 군사로 왜장 고시니 유끼나가가 이끄는 수만은 왜적을 맞아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전적지이다. 또한 이곳에는 정상부에 토석이 있으며 문화원 야외음악당 대흥사 산장 휴게소 등이 있다.  

 

충청북도기념물 제4호               

소재지 :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


우륵에 대하여

 

우륵이 가야국에서 지은 12곡은 첫째가《하가라도(下加羅都)》, 둘째는 《상가라도(上加羅都)》,셋째는《보기(寶伎)》,넷째는《달기(達己)》, 다섯째는《사물(思勿)》, 여섯째는 《물혜(勿慧)》, 일곱째는 《하기물(下奇勿)》,여덜째는 《사자기(獅子伎)》,아홉째는 《거열(居烈)》,열째는《사팔혜(沙八兮)》,열한째는 《이사(爾赦)》, 열두째는 《상기물(上奇勿)》이었다.니문(尼文)이 지은세곡은, 첫째는 오(烏 : 까마귀),둘째는 서(鼠 : 쥐), 셋째는 순(순: 메추라기)이었다. [삼국사기]32권, 잡지 제1, 악 이들 곡이름은 대부분 당시의 군 ·현의 이름에서 따 온 것으로 해당지역의 민요 연구에 긴요한 자료가 된다. 충주의 금휴포(琴休浦)와 탄금대(彈琴臺)는 모두 그 이름이 우륵에게서 유래한다고 한다."

이중에서 보기, 사자기, 이사를 제외한 나머지 9곡은 당시의 군현명과 같아서 해당 이 악법을 제정하고 인정을 연유하여 준절케하였으니 나라가 잘 다스려 지고 어지러운 것은 음조에 연유한 것이 아니다"하고 이를 행하게 하였으므로 대악으로 발전되었다. 이상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우륵의 생애에 관한 전부이다.

충주읍지에 의하면 우륵은 탄금대에서 가야금에 전념하였다 하는데 그 말년에 관하여는 전혀 알길이 없으며 다만 우륵이 탄금대에서 탄 가야금의 오묘한 음악에 이끌려 모여든 사람들이 부근에 부락을 이루니 이것이 칠곡리(지금의 칠금동), 금뇌리(지금의 금능리), 청금리(지금의 청금정) 등의 마을 명칭이 오늘까지 이르르니 우륵의 가야금에 담은 예술은 참으로 위대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거문고는 귀족이나 문인의 악기이지만 가야금은 그야말로 전문적인 악사 악공의 악기로서 교방에서 그 전통을 이어받았던 것으로서 그 오열하는 듯한 가야금의 선율은 망국의 음악이라고 할 만큼 비창하여 사람의 심금을 울려주는 것이다.

가야국은 망했어도 가야금은 남겼으니 예술은 참으로 깊고도 영원하다 하겠다. 충주시 칠금동 산1번지에 위치하는 탄금대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고 제자들에게 전수한 유서깊은 유적지로서 지방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977년에 악성우륵선 생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고 우륵선생의 위대한 예술혼을 오늘에 되살려 우리의 국악을 계승발전 시키려는 향토제전인 우륵문화제가 해마다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다.

 


충장공(忠壯公) 신립장군(申砬將軍)

 

우리는 신립장군을 임진왜한 때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친명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1971년 예총 충주지부가 설립되고 같은 해 충주 및 충북 북부지역의 예술 문화 활동 및 전통있는 향토문화 계승과 창달을 위해 종합 예술 행사로서 우륵문화재를 개최하여 30여년 계속하고 있다. 우륵문화제 행사 중 전야제로 행해지는 명현추모제가 시행되는데, 충장공 신립, 3대 악성의 한 분인 우륵, 대문장가 강수, 명필 김생, 충민공 임경업 등 5현을 모신다

명현이란 유명한 현인을 말함일 것이고, 충주에서는 신립을 명현으로 자리매김하고 매년 우륵문화제가 시행될 때마다 명현으로 예우해 왔다. 그러나 근년에 이들 5현의 인물상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요구하는 일부의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그 일환으로 본고를 집필하게 된 것이다.

 

신립은 명종 원년(1546년)에 태어난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탄금대 전투에서 수눅ㄱ할 때까지 즉 조선중기에 살았던 인물이다. 신립(申砬)이 살아가던 16세기 후반에 조선은 개국 후에 보여준 문물의 창조와 발전은 점차로 퇴보와 분열의 시기에 접어들면서 사회정의와 기강이 서서히 문란해지고 있었다. 더욱이 사화와 붕당으로 인한 지배층의 분열로 국력이 점차로 쇠퇴하고 따라서 국방력도 허술해 지면서 나라의 운명이 점차 위험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대륙에서는 여진족의 세력이 점차로 커지는 양사응로 나타나고 만주지역의 여진족은 우리나라의 북부지역을 노략질하기 시작하여 선조 16년(1583) 니탕개의 난이 일어났다. 한편 일본은 전국시대라는 내부의 분열싸움이 16세기말에 이르러 혼란이 수습되었다. 이 시기의 발본과의 관계는 삼포왜란(중종 5년 1510), 사량진왜변(중종39 1544), 을묘왜변(명종 10년 1555)이 일어났으며 선조20년(1583) 2월 왜적선 18척이 전라도 흥양 지경을 침범하여 이들과 싸우던 녹도 권관 이대원이 전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남왜북도에 대한 대비책에 부심하고 잇었으나 실제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무장이었던 신립(申砬)은 북쪽의 니탕개의 난을 평정하여 무명(武名)을 떨쳤고, 남쪽에서 침입한 왜군이 동래와 상주전투에서 이기고 파죽지세로 북상하는 적을 충주에서 맞아 싸우다가 순국한 명장이다.

 

역사적 사실에서 인간의 허와 실을 종합적으로 파악, 객관적으로 명쾌하게 언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까닭은 관련자료의 유.무라는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흔히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전쟁이나 정치적 대결에서 승자가 자기편을 정당화하는데 유리한 기록만을 남겨두고 불리한 증거가 되는 자료들은 제거해 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신립의 인간상을 재조명함에 있어서도 현재가지 남아 전하는 사료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인물에 관한 사료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음이 상례이지만 이를 면밀히 분석하여 신립의 인간상을 재조명하여 사실에 접근하려고 노력하였다.

 

 

조회수: 4418 위치: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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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다리아저씨 07.08.27 09:39:43
    위치를 알수잇으면 좋겠네요^^
  • 조은충주 07.08.27 11:51:39
    우측에 있는 지도정보를 클릭하시면 지도정보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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